엉규이 무덤전 원균 묘 발견 비하인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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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균이 죽었다고 알려진 "춘원포"는 1993년 통영 향토사학자 김일룡 씨가 현지 답사를 통해 오늘날 통영시 광도면 황리 였을 가능성을 발견했다. 사실 이때까지만 해도 엉규이 무덤은 잘 안 알려졌었다.
그러다가 이순신 전략연구소 이봉수 소장이 한국토지주택공사 이사시절(2004년) 현장답사를 통해 엉규이 무덤 위치를 대중에게 알렸다.
이봉수 소장이 인터뷰한 이형규 옹
아래는 이봉수 소장의 저서 [이순신이 싸운 바다]의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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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원포는 원균 장군이 상륙하여 왜군과 최후의 혈전을 벌이다 전사한 곳이다.
춘원포가 통영시 광도면 황리라는 사실은 알고 갔지만 막상 현장에 가보니 온 산천이 개벽을 해버린 곳이었다. 도시가스 기지를 건설하고 있었다.
2004년 6월 어느 날 필자는 여기저기 기웃거리다 황리3구인 내촌마을로 들어섰다. 운이 좋았는지 이 조그만 마을에서 박식한 노인 한 분을 만났다. 내가 임란 해전 현장을 취재하러 다닌다고 하자 마을 입구의 정자나무 아래 앉아 있던 그 분은 무척 반가워하며 지역 향토사를 줄줄 풀어놓았다.
이곳 안정만은 옛날에 춘원만이라 했으며 도시가스 기지가 들어서고 있는 곳을 춘원들이라 했단다.
황리1구에 있는 돌감나무 골에는 원균 장군의 묘지가 있다는 놀랄 만한 사실을 노인은 내게 말해 주었다. 옛날에 논을 개간하면서 머리(頭)가 없는 장군의 시신을 발굴하여 근처에 매장했다는 기이한 이야기를 했다. 왜군에게 쫓긴 원균 장군이 이곳 황리의 돌감나무골에 이르러 끝까지 의연하게 싸우다 전사(?)했다는 것이다.
지금(2004년) 살아 있으면 130∼140세 정도 되는 이 고장 농부들이 예전에 논을 개간하면서 갑옷을 입은 채 숨진 머리가 없는 칠 척 장수의 유골을 수습하여 그 바로 아래 밭에다 매장했다고 한다. 밭에는 묘지 봉분이 두 개 있는데 둘중의 하나가 그 묘라고 했다.
노인을 앞세우고 찾아간 돌감 나무골은 황리1구에서 고성군 동해면 당동 방향으로 가는 길을 따라 가다가 약 500미터쯤 떨어진 곳에 있었다. 2차선 도로를 사이에 두고 당시 개간했다는 논과 시신을 수습하여 묘를 썼다는 밭이 아래위로 마주보고 있었다. 노인이 지목하는 묘는 봉분이 확실히 있는 것이 하나 있고 그 옆자리에 흔적만 남은 것이 있는데 둘 다 풀이 한길이나 자라 있었다.
노인은 또 내게 말씀하시기를, 노산 이은상 선생이 생전에 이곳 돌감나무골의 이야기를 듣고 한때 제자들과 함께 발굴을 시도하기도 했으나 비용문제 등으로 그만두었다고 한다. 어쨌거나 이 고장은 원균 장군의 한이 맺힌 곳이 확실해 보인 다. 지금이라도 향토사가들과 후손들은 이 노인의 이야기를 예사로 듣고 넘겨서는 안 될 것이다. 현재 원균 장군의 묘는 시신이 없는 초혼장(招魂葬)으로 경기도 평택시 도일동 산 82번지에 모셔져 있다.
노인은 원래 이 고장은 고성군 춘원면(광산면)이었다고 하면서 1400년 전 원효 대사가 창건한 안정사라는 절이 있는 불교성지인데 도시가스 기지가 들어선 것을 못마땅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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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봉수 씨의 저서에는 이렇게 나와있다.
작성자가 김일룡 향토사학자와 통화했을땐 "간척 공사 당시 춘원포 일대를 발굴하자고 제안했으나, 당시의 난 박사학위가 없었기에 받아들여지지 않고 공사가 진행되었다"라고 답했다. 만약 1968년에 이은상 시인의 제안이 받아들여져 발굴이 되었다면 좋았을텐데 당시엔 당장 먹고살기도 힘들었으니 이해해야지...
물론 어디까지나 구전이라 진짜 원균 묘가 아니라 그냥 가족 없는 무연고자 묘일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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