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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루살렘 왕국의 한센병 복지 시스템은 어땠을까?

    본문

    성 라자로 기사 수도회는 13세기 중반에 확고하게 자리매김하였음을 알 수 있으나 그의 기원은 매우 모호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1142년 예루살렘 왕국에서 한센병 환자의 병원으로 시작한 것으로 현존하는 자료들에 처음으로 언급되었다. 예루살렘의 군주 풀크는 아내 멜리장드와 아들 보두앵 3세의 동의를 얻어 성 라자로 교회와 불쌍한 자(miselli)로 불렸던 아픈 자들의 수도원에게 한 토지를 인정해주었다.

     

    성 라자로 수도회는 예루살렘 왕국의 거주자 가문들에게 점차 중요하게 인식되었다. 수도회의 토지대장에서는 왕실 가문과 대 귀족들의 기록이 작은 부분을 차지할지라도, 그들의 관심 대상이 되었다. 군주들인 풀크, 보두앵 3, 및 아모리는 멜리장드 여왕이 하였던 것처럼 기부를 하였다. 특별히 흥미로운 기부는 아모리의 것이었는데, 한 사람의 한센병 환자를 지원하기 위해 매년 특별히 50베잔트(besants, 동로마 제국의 금())의 세를 기부하였고, 그 금액은 처음의 수령자가 사망하면 다른 환자에게로 이전하도록 하였다. 이것은 1171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아모리 군주가 자신의 아들(보두앵 4)의 한센병을 인식하게 되었을 때였던 것이다.


     

    아모리 1세.jpg 예루살렘 왕국의 한센병 복지 시스템은 어땠을까?



    예루살렘 왕국의 일부 계보

    9086e6e6554670c2fe7eb143d781ec6a9f6b1853f103a4bd2a7b8a218b13d21e6d2c11f887002ed6f45e49cb2910a6f2927e61ee0b7665e205b879687d75054ca6a3873f8ca7f858594a33e0e41242834fd51943672486a22d5db835e5e3915c.jpeg 예루살렘 왕국의 한센병 복지 시스템은 어땠을까?


    멜리장드 여왕 + 풀크 왕

    장남 보두앵 3

    차남 아모리

     

    보두앵 4


    보두앵과 신하들.jpeg 예루살렘 왕국의 한센병 복지 시스템은 어땠을까?

     

    12세기의 예루살렘 성지의 대귀족들이 기부자들로 드러났는데, 베이루트, 카이사리아, 토론, 갈릴리, 야파 그리고 나불루스의 주군들과 트리폴리 백작 등 이 모든 이들이 라자로 수도회와 연관되었다. 기부자들의 부분은 그들의 특권들을 전통적인 이유에서 수여하였는데, 사망한 친지들의 영혼을 위한 것이었으며, 또한 개인적인 친분들에서 나온 것도 있었다. 이는 라자로 수도회가 한센병에 걸리게 되었던 예루살렘 라틴 왕국의 정착자들에게 존경받는 도피처로서 활동하였음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13세기에 두 명의 라자로 수도회의 단장들의 이름도 확인할 수 있는데 즉 카스텔 네프의 왈터(Walter of Chastel Neuf)와 레이나드 플레우리(Rainaud of Fleury)로 두 인물 모두 한센병 환자들이었고, 성지의 라틴 귀족과 긴밀한 연대를 지녔음을 알 수 있다.

     

    12세기 후반에 군주에 관한 책(Livre au Roi)으로 알려진 법전에서 한센병에 걸린 한 기사 혹은 병사들은 성 라자로 수도회에 들어가야만 한다고 명시하였다. “그곳은 그러한 질병에 걸리게 되었던 사람들을 위해 건립되었다.” 한센병에 걸린 사람의 아내는 수녀원에 들어가야 했고 그들의 재산은 그들의 상속자들에게 양도해야만 했다. 상속자들이 없을 경우 그들의 주군에게 돌려주어야만 했다. 이들의 규율에서 한센병에 걸린 형제들은 성 라자로 수도회로 이전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그들이 그렇게 하도록 강제되지는 않았을지라도. 그곳은 성지에 있는 가문들과 성전기사단들이 값을 지불하고 준비하였던 한 피신처가 되었다. 카이사리아의 위그와 그의 가문은 한 과수원과 두 채의 가옥들을 제공하였다. 두 채 가운데 하나는 이전에 그의 형제의 소유였으나 지금은 그 수도회의 한 구성원이 되었던 사람의 것이었고, 성전기사단들은 그들 수도회의 한센병 형제들을 돌봐주는 것에 대한 대가로 라자로 수도회에 지속적으로 지불하였다.

     

    1240년대와 1250년대에 서술된 자료들은 라자로 형제들이 군사적인 일들에서의 일련의 눈에 띄는 개입을 하였음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싸우는 역할의 수용은 동방에서의 악화되는 군사적인 상황에 대한 한 응답이었던 것처럼 보인다. 인력은 언제나 부족하였고, 그리하여 수도회는 건강한 사람은 물론 병자들까지도 전투에 포함되었다. 더욱이 한센병은 진전되는 질병으로 몇몇 경우에 많은 세월이 지난 후 완전히 한센병 환자가 되었음을 보여주었다. 1119년에 한센병 환자였음에도 군대를 이끌었던 로베르 제르다나(Robert of Zerdana)는 당시 그의 무슬림 적군들에게조차 한센병 환자였음이 잘 알려진 인물이었고 군주 보두앵 4세는 프랑크인들의 군대를 여러 번 통솔하였다. 이들은 예외적인 인물들이긴 하지만 한센병의 초기 단계에 있던 사람들은 싸움에 임할 수 있었을 것이며, 사실상 기사 계급 출신들인 이들은 전투를 이끌 수 있는 지위와 위엄을 열망하였을 것이다.

     


    보두앵 4세.jpg 예루살렘 왕국의 한센병 복지 시스템은 어땠을까?

     



     

    이영재, 12세기 성지 예루살렘에 등장한 기사 수도회들(Military Orders)에 관하여 : 성 라자로, 성 토마스, 마운트조이를 중심으로, 한국서양중세사학회 서양중세사연구 50, 2022.

    https://www.earticle.net/Article/A4183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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