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항서가 개척한 길, 김상식이 갈고 닦는다…베트남 축구 이끄는 ‘환상의 계보’[하노이 리포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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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서울 | 하노이=정다워 기자] “나는 지는 별, 김상식 감독은 뜨는 별이다.” 박항서 대한축구협회 부회장이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다.
베트남 축구는 박항서 부임과 전, 후로 나뉜다. 2017년 박 부회장이 지휘봉을 잡은 후 베트남은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동남아시아축구선수권대회, 동남아시안게임을 석권했고, 23세 이하(U-23) 대표팀에서 굵직한 성과를 냈다. 바야흐로 황금기를 이끈 주인공이다.
2022년을 끝으로 박 부회장이 사령탑에서 내려온 뒤 베트남은 암흑기를 겪었다. 프랑스 출신 필립 트루시에 감독 체제에서 갈 길을 잃었다. 2년간 방황하던 베트남은 지난해 5월 다시 한국 지도자의 손을 잡았다. 주인공은 김상식 현 감독. 다시 비상이 시작됐다. 동남아시아축구선수권대회, 동남아시아 U-23 대회에서 연속 우승하며 도약했다. 한국 지도자를 선임한 효과는 뚜렷했다.

지난 23일 베트남 하노이의 항더이 경기장에서 박 부회장과 김 감독이 함께 등장했다. 꽁안 하노이와 매카서의 아시아축구연맹 챔피언스리그2 경기가 열린 현장이었다. 두 사람은 나란히 귀빈석에 앉아 경기를 지켜봤다. 언론, 관중의 스포트라이트가 쏟아졌다.
두 사람은 다른 일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베트남 선수의 특징, 버릇, 선수 간의 관계, 심지어 사생활까지 꿰고 있는 박 부회장은 김 감독의 ‘과외 선생님’이었다. 여전히 선수를 관찰 중인 김 감독을 위해 꽁안 선수들에 관한 다양한 정보를 제공하는 모습이었다.
지금도 박 부회장을 ‘감독’이라 부르는 김 감독은 “나는 박 감독님 덕분에 정말 편하다. 선수에 관한 디테일한 얘기를 많이 해주신다. 심지어 원정 경기장 분위기, 훈련장 상황까지 알려주신다. 내가 직접 겪어 봐야 알 수 있는 것들을 미리 파악하게 된다. 시행착오를 줄이고 더 빠르게 베트남에 녹아든 비결이자 원동력”이라고 말했다.

베트남 하노이 현지에서 김 감독의 인기는 뜨겁다. 길거리를 걷든, 식당에 가든 모두가 알아보고 인사를 건넨다. 6~7년 전 박 부회장이 있던 시절과 다르지 않은 분위기다. 꽁안 하노이 고위 관계자와의 만남에서 김 감독은 “이게 다 박 감독님 덕분”이라며 몸을 낮췄다. 박 부회장도 질세라 “이제 나는 지는 별이다. 김상식 감독이야말로 뜨는 별이다. 앞으로 더 빛날 것”이라며 후배를 띄웠다.
사실 박 부회장이 베트남을 개척하지 않았다면, 지금의 김 감독은 없었을 가능성이 크다. 김 감독도 “박 감독은 내가 베트남에 온 것의 큰 지분을 차지하는 분이다. 주주인 동시에 내 정신적 지주이기도 하다. 내 멘토다. 항상 의지하게 된다”라고 말했다.

부담이 큰 것도 사실이다. 김 감독은 “박 감독님의 위상은 내게 부담이 되는 게 사실이다. 비교가 엄청나게 된다. 혹시라도 나 때문에 감독님이 피해를 볼까 걱정할 때도 있다”라고 말했다. 그렇다고 박 부회장을 뛰어넘어야 한다는 생각은 애초에 하지도 않았다. 그저 짐이 되거나 오점을 남길까 우려할 뿐이다. 김 감독은 “내가 감독님의 업적을 뛰어넘는 것은 불가능하다. 아예 쳐다보지도 않는다”라고 확실하게 선을 그었다.
박 부회장에서 김 감독으로 이어진 환상의 계보는 또 다른 주자로 이어질지도 모른다. 김 감독은 “박 감독님 덕분에 내가 베트남에 온 것처럼, 나 덕분에 다른 한국 지도자가 새로운 역사를 쓸 수도 있지 않겠나. 그럴 수 있도록 내가 더 잘하고 좋은 성과를 내야 한다. 한국 감독의 자존심과 명예를 걸고 전진하겠다”라는 각오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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