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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풋볼 아이코닉] 펩 과르디올라의 바이에른 뮌헨: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실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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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심
    2025-02-26 17:17 34 0 0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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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펩 과르디올라의 바이에른 뮌헨;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실패'.jpg [풋볼 아이코닉] 펩 과르디올라의 바이에른 뮌헨: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실패"

    바이에른 뮌헨은 독일 축구 역사상 가장 크고 부유한 팀으로, 그야말로 독일 축구의 절대적인 존재이다.


    그들은 자국에서 너무나 많은 우승을 차지해서, 이제는 그들의 이름이 새겨진 '마이스터샬레'가 들어 올려지지 않으면, 놀라울 정도이다. 앞으로도 이 상황은 변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바로 이 지배적인 모습 때문에, 이 구단에서 만들어진 놀라운 팀들을 제대로 인정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이렇게 강력한 팀과 언제나 우승을 거두고 최고의 선수들을 보유한 감독을 결합했을 때, 칭찬에 인색한 사람들이 있다는 것도 놀라운 건 아니다.


    펩 과르디올라가 이끈 바이에른 뮌헨의 3년은 경이로운 성과이다. 3년 동안 75%의 승률. 최고의 선수들을 육성하고 발전시킨 것. 실수도 있었고, 그 외에도 많은 일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르디올라는 불가능한 과제를 부여받았다. 완벽함을 개선하라는 것이었다. 그가 합류한 팀은 당시 세계 최고의 팀이었다.


    그리고 이를 어떻게 평가하느냐에 따라, 과르디올라는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일부는 그가 구단을 망쳤다고 말하기도 한다.


    게다가 그가 차지한 모든 트로피 중에서도, 그가 들지 못한 트로피는 그 3년을 정의하는 트로피로 여겨지게 되었다.


    맞는 말일까? 더 중요한 것은, 과르디올라의 바이에른 뮌헨은 얼마나 뛰어났을까?





    영광으로의 귀환

    펩 과르디올라의 바이에른 뮌헨;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실패' - 1.jpg [풋볼 아이코닉] 펩 과르디올라의 바이에른 뮌헨: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실패"

    이야기는 200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바이에른 뮌헨은 21번째 분데스리가 타이틀을 10점 차로 차지했다. 멋진 일이었고, 바이에른 뮌헨은 강력한 팀이었죠.


    하지만, 그들은 오늘날과 같은 독일 내 압도적인 우세에는 도달하지 않았다.


    그 전 해인 2007년, 바이에른은 지난 30년 동안 가장 낮은 순위인 4위로 마감한 시즌을 보내기도 했었다. 60점이라는 성적을 기록했죠.


    그 이유는 팀이 많은 변화를 겪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3년 전에 알리안츠 아레나로 이전한 상태였다.


    새로운 밀레니엄을 맞이했던 팀은 나이가 들어가거나 폼이 떨어지거나 떠나기 시작했다.


    올리버 칸은 2008년에 은퇴를 선언했고, 미하엘 발락은 잉글랜드로 떠났다. 제 호베르투는 일관성이 없었고, 로이 마카이는 여전히 골을 넣고 있었지만, 바이에른은 이 시기의 변화와 재구성을 거쳐가고 있었다.


    이 선수들은 모두 바이에른에게 수 년 동안 필수적인 존재들이었다.


    감독들 또한 바이에른과 함께 성공을 거두었던 펠릭스 마가트와 오트마어 히츠펠트가 있었지만, 그들은 2007년 이후엔 예전만큼 효과적이지 않았다.


    바이에른은 여러 감독들을 거쳐갔지만, 그들은 그리 뛰어난 성적을 거두지 못했다. 더군다나, 그들에겐 강력한 경쟁자들이 있었다.


    샬케는 "다시 거대한 구단이 될 수 있을까?"라는 기로에 있었고, 슈투트가르트는 항상 위협적인 존재였으며, 볼프스부르크는 2009년 리그 우승을 차지하며, 예기치 않게 경쟁자로 떠올랐다.


    그리고 물론, 2011년과 2012년엔 위르겐 클롭의 천재적인 지도 아래 보루시아 도르트문트가 우승했다. 2012년, 바이에른은 분데스리가에서 2위, 포칼에서 2위, 도르트문트와의 3경기에서 모두 패했다. 아픔.


    결국 2007년에서 2012년 사이에 바이에른은 분데스리가에서 2번 우승하고, DFB 포칼을 2번 우승했다. 또한, 두 번의 챔피언스 리그 결승에 올라갔지만, 두 번 모두 패했다.


    일반적인 구단이라면, 이 정도는 트로피를 많이 딴 시기라고 할 수 있겠지만, 바이에른에겐 용납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가 바이에른의 놀라운 성장이 시작된 시점이었음을 언급해야 할 것 같다.


    2005년, 알리안츠 아레나로 이사할 때, 바이에른은 €340m의 대출을 받았다. 25년을 갚을 계획이었죠.


    그러나 2014년, 9년 만에 바이에른은 그 대출을 모두 갚았다. 무려 16년을 앞당긴 셈이죠. 이 과정에서 바이에른은 아디다스, 아우디, 알리안츠에 25%의 지분을 팔았다.


    2024/25 시즌, 알리안츠 아레나의 수익은 연간 €230m에 달하고 있으며, 이는 계속 증가할 예정이다. 이 모든 수익은 바이에른의 지갑으로 직행한다.

    2012년

    펩 과르디올라의 바이에른 뮌헨;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실패' - 2.jpg [풋볼 아이코닉] 펩 과르디올라의 바이에른 뮌헨: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실패"

    유프 하인케스. 즉 – 문제 해결자. 바이에른이 곤경에 처하면 그가 온다. 원래 80년대 후반에 감독을 맡았고, 이또한 당연히 성공적이었다.


    그는 2009년, 팀이 붕괴 직전에 있을 때 임시 감독으로 돌아왔고, 2011년에도 또 한 번 그런 상황에서 돌아왔다. 그리고 몇 년 후, 2017년에도 또 같은 이유로 돌아왔다. 하지만 2011년에는 진또배기로 돌아온 것이었다.


    아마 그에는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2012년에 완성된 이 팀은 현대 축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팀 중 하나였다.


    2008년, 프랑크 리베리가 전환기의 초기에 합류했고, 아르연 로번은 2009년에 합류했다. 로베리는 네덜란드 동포인 루이 반 할 덕분에 완성되었다.


    이 팀 구성을 가속화한 공을 인정받는 인물은 바로 반 할 감독이다.


    그는 또한 토마스 뮐러, 토니 크로스, 데이비드 알라바에게 처음으로 의미 있는 출전 시간을 부여한 감독이기도 했다. "Müller spielt bei mir immer" "저와 함께, 뮐러는 항상 플레이합니다." 반 할의 전설적인 말 - 거의 모든 사람이 공유하는 감정이다.


    주장 필립 람과 부주장 바스티안 슈바인슈타이거는 오랫동안 팀을 지켜왔다. 이들 역시 유스 출신이었다.


    루이스 구스타부와 제롬 보아텡은 2011년에 합류했다.


    그 외에도 제르단 샤키리, 단치, 마리오 만주키치, 하비 마르티네즈가 합류했다.


    바이에른은 칸을 잃었지만, 어쩌면 그보다 더 미친 골키퍼를 영입했다. 다만, 다른 종류의 미친 골키퍼죠. 마누엘 노이어였다.


    특히 하비 마르티네즈는 €40m이라는 금액으로 분데스리가 역사상 가장 비싼 이적생이었다. 이 이적은 전적으로 하인케스의 결단 덕분이었다. 사실, 이 영입에 대해 질문을 받았을 때 하인케스는 프란츠 베켄바워와 다른 모든 바이에른의 위대한 인물들이 마르티네즈가 누구인지 전혀 몰랐고, 커피 브랜드를 말하는 거냐고 밝히기도 했다.


    마르티네즈는 아마도 최근 바이에른 역사에서 가장 과소평가된 선수들 중 한 명일 것이다.


    팀은 매우 유연했다 – 높은 압박, 역습. 시즌 동안 98골을 기록 – 사실상 매 경기당 3골. 그리고 흥미로운 움직임에서 나온 골들이었다.


    토마스 뮐러는 스위스 군용 칼과 같았고, 부상당한 미드필더나 공격수의 자리에 자연스럽게 들어갔다. 센터백들은 빠르고 정확한 공 배급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왼쪽 윙, 오른쪽 윙, 말만 들어도 무서워. 슈바인슈타이거는 전성기를 맞이했고, 크로스는 전성기를 향해 가고 있었다. 만주키치는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이 얼마나 똑똑한 선수였는지에 대한 평가를 마땅히 받지 못할 것이다. 그는 결코 전통적인 스트라이커는 아니었지만, 190cm인 그의 몸집을 고려해볼 때, 훨씬 더 운동 능력이 뛰어났다.



    바이에른은 다시 정상에 돌아왔다. 그리고 그들은 도르트문트를 모든 대회에서 이겼다. 리그에서 91점으로 리그 기록을 세우며, 25점 차로 1위를 차지했고, 포칼 8강에서 도르트문트를 꺾었으며, 챔피언스 리그 결승에서도 그들을 이겼다.



    그 이후 바이에른은 2020년 또 다른 트레블을 달성했지만, 많은 바이에른 팬들과 일반 팬들 사이에선 이 때의 팀이 더 흥미롭고 완벽했다고 여겨진다. 그들이 이를 해낸 방식까지 더하면, 그야말로 완벽함이었다.


    그들은 34경기 중 29경기를 승리하고, 18골만 실점하며 +80의 골득실을 기록했다. 또 이건 리그에서의 성적이었다. 아마도 이는 세계 축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시즌일 것이다.



    ...그러고 아스날은 그들을 2-0으로 이겼다.



    하인케스는 이미 바이에른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린 인물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는 불멸의 존재가 되었다.



    불멸을 기념하는 더 좋은 방법이 있을까? 바로 하인케스가 시즌이 끝나고 은퇴하기로 결정했다고 발표한 것이었다. 우아한 퇴장이다.



    하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었다.



    보세요, 제가 지금까지 얘기한 모든 것은 하인케스가 바이에른의 구세주라는 관점에서 설명된 것이다. 그는 정말 구세주였죠.



    하지만 2012/13 시즌 전, 팀의 실패들이 바이에른 구단 이사회에 큰 상처를 남겼다.



    특히 중요한 부분은 챔피언스 리그 결승에서의 패배들이다. 2010년, 그들은 주제 무리뉴의 인터 밀란에게 완전히 압도당하며, 졌다.



    더욱더 심각한 것은, 트레블을 달성하기 바로 한 해 전, 2012년 챔피언스 리그 결승이 알리안츠 아레나에서 개최될 예정이었다는 점이었다.



    바이에른은 그 해 결승에 올라갔고, 당시 언더독 첼시와 맞붙었다. 바이에른이 우승 후보였다는 것은 과장도 아니었다.



    예상대로, 바이에른은 경기를 지배했다.



    하지만 정규 시간 동안 페널티를 놓쳤고, 디디에 드록바의 헤딩으로 동점을 허용하며, 결국 승부차기에서 패배했다.



    펩 과르디올라의 바이에른 뮌헨;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실패' - 3.jpg [풋볼 아이코닉] 펩 과르디올라의 바이에른 뮌헨: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실패"

    이건 정말 큰 충격이었다.



    그것과 리그에서의 실패들이 합쳐져 경영진은 하인케스의 후임을 찾기 시작했다. 그가 67세였으니까요. 아마 그가 예전의 기량을 잃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거죠.



    그들은 틀렸다.



    그리고 그가 완벽한 반전을 이루고 역사를 만들고 있는 동안, 독일 축구 역사상 첫 번째 트레블 우승을 이끌어낸 동안에도, 마티아스 자머 당시 스포츠 디렉터와 울리 회네스 당시 구단 회장은 이미 그의 후임을 물색하고 있었다.



    그 후임은 이미 2013년 1월에 확정되어 발표되었고, 이 소식은 다양한 반응을 일으켰다. 매주, 바이에른은 자신들이 역대 최고의 시즌을 보낼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바이에른 측에서는 하인케스의 퇴장을 그가 스스로 은퇴를 준비하는 과정으로 프레임을 잡았지만, 사실 그는 여전히 많은 걸 해낼 수 있어 보였다.



    실제로, 1년 후 울리 회네스는 하인케스가 또 한 해를 더 지내고 싶어 했지만, 구단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고 밝혔다.



    "우리는 하인케스에게 일찍부터 우리가 펩 과르디올라와 연락을 취하고 있다고 알려줬다. 물론 그는 한 해 더 하고 싶었겠지만, 결국 그가 결정을 내렸다. 우리는 그가 불평하지 않은 것에 감사하고 있다."



    결국, 다음에 올 사람은 불가능한 임무를 맡게 될 것이었다. 사랑받는 감독을 대체하는 일, 바이에른에 다시 영광을 가져다준 사람, 미소를 되찾아 준 사람. 구단과 깊은 역사를 지닌 사람. 그리고 최고의 순간에 떠난 사람을 대신하는 일이었다.



    이로써, 바이에른에서 이어지는 임기가 극단적으로 양극화될 수밖에 없다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기다려온 귀환

    펩 과르디올라의 바이에른 뮌헨;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실패' - 4.jpg [풋볼 아이코닉] 펩 과르디올라의 바이에른 뮌헨: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실패"

    펩 과르디올라는 축구계에서 가장 큰 수수께끼 중 하나다.



    그의 얼굴은 언제 봐도, 수백만 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듯한 표정을 짓는다.



    열정적이고, 오만하며, 집착적이다. 이 세 가지 특성은 종종 혼동되곤 하지만, 어쩌면 모두 그에게 딱 맞는 말일지도 모른다.


    그는 바르셀로나 1군 감독으로서 처음 4시즌 동안 무려 14개의 트로피를 들어 올렸으며, 트레블을 달성하기도 했다.



    역대 최고의 바르셀로나 유소년 출신 세대를 중심으로 축구 왕조를 건설했고, 과르디올라 특유의 위치 기반 축구 철학—지배적인 점유율과 공간 우위를 중시하는 전술—을 창조해냈다.


    그리고 그는 사라졌다.



    말 그대로 유럽 대륙을 떠나 뉴욕으로 건너가 안식년에 들어갔다.


    2012년 중반, 과르디올라는 무리뉴와 레알 마드리드, 그리고 그 외의 모든 압박에 지쳐 축구계를 떠났다.



    하지만, 그가 실제로는 축구와 완전히 거리를 두진 않았다는 점이 흥미롭다.



    이 기간은 오히려 그가 바르셀로나에서 마지막 시즌에 저질렀던 실수들을 되돌아보고 재평가할 기회를 주었다.


    마드리드와의 경쟁을 떠나, 그는 스스로 아이디어가 바닥났다고 느꼈으며, 팀에 대한 자신의 영향력이 약해졌고 전술적 접근이 예전만큼 효과적이지 않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변화를 원했다. 더 나아지고 싶었다.


    미국에 머무르는 동안, 그는 창의적인 사고를 확장하기 위해 다양한 인물과 교류했다.



    체스 챔피언 가리 카스파로프와의 우정은 축구를 접근하는 새로운 시각을 열어주었다.



    체스 그랜드마스터 망누스 칼센과의 대화에서도 그는 체스와 축구의 유사성, 그리고 두 게임에서 최고의 경쟁자들이 보여주는 사고방식을 깊이 존중함을 드러냈다.


    2013년 1월, 과르디올라는 다시 경기장으로 돌아갈 준비가 됐다.



    이 정도 급의 감독이 자유 계약 상태로 시장에 나온다는 건 극히 드문 일이다.



    게다가 본인의 의지로 물러나 여유까지 있었으니, 모든 구단들의 관심이 쏠릴 수밖에 없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그에게 관심을 보였다.



    첼시도 마찬가지였다.



    축구계 전체가 긴장 속에 숨을 죽였다.


    하지만 그가 선택한 팀은 다름 아닌, 바이에른 뮌헨이었다.



    당시 세계 최고의 팀 말이다.


    과르디올라가 우리에게 보여준 게 있다면, 그는 정말 집념의 사나이라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믿음을 굳게 가졌다.


    첫 번째 단계는 언어 습득이었다.



    독일 분데스리가에서는 언어 적응이 사실상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안식년을 회상하며, 과르디올라는 미국에서 하고 싶었던 일 중 하나가 영어 실력 향상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정작 그는 영어권 국가에 있으면서 독일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나는 독일어 공부를 시작했다. 정말 복잡한 언어다. 매일 아침 3~4시간씩 문법을 공부했는데, 두 달쯤 지나니 이런 생각이 들더라. '계약을 취소하자고 전화할까?'

    독일 아이들도 배우기 힘들다는데, 41살인 내가 상상이나 되나?

    하지만 나는 고집이 세다."



    하지만 과연,



    그 고집만으로 과르디올라는 이 도전을 이겨낼 수 있었을까?





    잘못된 방법으로 이기는 것

    펩 과르디올라의 바이에른 뮌헨;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실패' - 5.jpg [풋볼 아이코닉] 펩 과르디올라의 바이에른 뮌헨: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실패"

    이 임명은 세계 축구계에서 큰 사건이었다. 하지만 의심도 있었다.



    “펩은 엄청난 명성을 가지고 왔다. 바르셀로나에서의 업적은 환상적이었지. 하지만 동시에 그는 자신의 축구 철학을 실현할 수 있는 선수들을 보유했던 운도 따랐다.” - 피터 슈마이켈



    정상에 있는 사람들조차도 그의 이전 성공이 오로지 그 자신 때문만은 아니었다면서, 깎아내리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첫인상은 최고였다. 바이에른인으로서의 첫 공식 등장에서, 그는 꽉 찬 알리안츠 아레나 강당을 그들의 모국어로 맞이했다.



    “Guten Tag und Grüß Gott”
     – 안녕하세요.



    게임 시작.



    그가 도착했을 때, 과연 세계 최고의 팀이 기다리고 있었다.



    새 영입 선수 마리오 괴체와 펩이 유일하게 직접 요청한 티아고 알칸타라까지 추가됐다. 이런 스쿼드를 가진다면 어떤 전술도 시도할 수 있다.



    그래서 초기 2년간의 실험이 종종 산만했던 것도 어찌 보면 당연했다.



    전술적으로 시즌 초반엔 4-1-4-1로 시작했다가 시즌 막바지엔 비슷한 개념의 4-2-3-1로 전환했다. 4-2-2-2, 4-3-3, 3-4-3, 심지어 2-3-5까지 시도했다. 포메이션 이름 자체는 중요하지 않았다. 모든 것이 유동적이었으니.



    그가 하려던 건 단순했다. 경기장 내 모든 취약 지점을 공략하고 모든 구멍을 메우는 것.



    물론, 선수마다 메우는 방식과 약점은 달랐다.



    하지만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다.



    부상과 그의 천재적 머릿속 덕분에 로테이션은 미친 듯했다.



    필립 람은 수비형 미드필더와 오른쪽 풀백을 겸했고, 슈바인슈타이거, 크로스, 마르티네스, 티아고 아들은 때로는 단독, 때로는 더블 피보테로 기용됐다.



    로번은 부상으로 들쭉날쭉했기에 뮐러와 괴체가 오른쪽 윙을 맡기도 했다.



    제롬 보아텡과 단테는 공을 잘 다루는 센터백이었다. "단테 같은 선수를 1000명쯤 갖고 싶다,"라고 펩이 말할 정도 였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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